2/20/2011

장교의 방.., Fort York Bathurst and Front St. Toronto Jun 18 2009

요즘의 전쟁 영화처럼 소위 Cool 하거나 블록버스터 급은 전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6.25 전쟁 당시의 전투 에피소드를 그려냈던 KBS 주말 연속극 전우.

극중 전투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에 남는 건 없지만
애수어린 그리고 어쩐지 좀 촌스럽기도 한 이 주제가 만큼은 기억이 생생하다.
가사가 정말 마음을 울렸었다.

대부대를 호령하는 지휘관도 아니고 직업군인으로 지원한 용병도 아닌..
그저 고향에 부모형제 다 놔두고 전쟁의 비극 속으로 뛰어 들 수 밖에 없었던 民草 병사들..

이 노래들 들으며 그들의 이미지를 그리다 보면 가슴이 막 미어진다.



구름이 간다.. 달도 흐른다
피끓는 용사들도 전선을 간다
빗발치는 포탄도 연기처럼 헤치며
강건너 들을 질러 앞으로 간다..
무너진 고지위에태극기를 꽂으며
마음에는 언제나 고향이 간다.
...




부친은 평생을 軍에서 보내셨다. 거의 40년 동안..

과거의 군인가족들은 참 먹을 것도 없었고.. 살곳도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언제나 전방의 다 스러져 가는 초가집 같은 곳에서 삯월세를 사셨다.
항상 연탄가스 중독에 어질어질 했고 같이 사는 집 주인의 사나운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부친이 대위 이셨을때 부대엔 주식인 쌀이 없어 감자로만 떼우신 적도 있으셨다.

하두 배가 고파 부식을 담당하는 선배 장교를 주먹으로 때리신 적도 있으셨다.. 으이구..ㅋ
마치 지금의 북한군처럼 헐벗었을 당시였다.

내 어린시절 부모님들은 그토록 온갖 고생을 하셨지만
그리고 곱게만 자라오신 어머니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항상 편찮으셨지만,
난 그 물좋고 산좋은 전방이 온통 다 놀이터였다.

눈깔사탕이라도 먹으려면 한참을 황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읍내로 나와야 가능했고.. 운이 좋을 경우 그 맛있는 짜장면 맛을 볼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은 어린 내게 풍성한 간식거리를 언제나 제공해 줬는데
냇가에서 어항으로 잡을 수 있었던 아름다운 피라미들..
가을에 곡식이 익을때면 논에는 수많은 메뚜기들이 온 사방으로 날라다녔다.

주전자에 가득 잡아온 메뚜기들을 소금을 좀 치고 연탄 불위에 올려 놓고 익혀 먹으면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다.

가끔 산으로 올라 계곡으로 들어가면조그만 돌들을 들칠때마다 가재가 있었다.
역시 주전자 가득 잡아온 가재를 끓이면 빨갛게 변했고 통채로 씹어먹으면 그렇게 맛있었다.
Red Lobster 였던 것이다. ㅋ

어린아이들이라 어른들이 캐오는 것처럼 거대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산에 가면 칡을 캐먹을 수 있었다.
당시의 향긋한 미국산 쥬시후레쉬 껌 만큼 cool 하진 않았지만..ㅎ..
달작지근 맛이 참 좋았는데.. 지금 보면 굉장한 건강식인 거다.

특히 이런 자연이 주는 건강한 간식을 먹기 위해서는 온갖 군데를 다 뛰어 돌아 다녀야 하니
신체발달 과정에 있었던 나로선 이보다 좋은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어린 내가 섭취해야할 단백질, 칼슘, 미네랄 그리고 각종 비타민들은
온통 주변의 소박한 자연 속에서 나왔다.

놀랍게도 온세상이 눈으로 가득 덮힌 삭풍의 겨울에도 먹을 게 풍성했다.
그건 콩이었는데, 잘 익은 콩이 덩쿨채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들을 꺽어 불을 피우면
금새 몸이 따뜻해 지면서, 마른 콩 껍질이 까맣게 탄다. 그걸 까면 김이 모락 모락 나면서 예쁘게 익어있는
뜨끈한 콩들이 나오는 것이다.  얼어터지는 손발을 종종 거리며 그 김나는 콩들을 까먹는 맛은 정말 좋았다.
그러고 나면 입주변은 물론 얼굴 구석 구석이 검댕으로 시커멓게 변하는데 그런 모습 역시 즐거웠다.

그렇게 친구들끼리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보면.. 뭔가 맛있는 향기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바로.. 불을 피우면서 위에다 대충 막 던져 올려 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감자들이다..
화들짝.. 녀석들을 불타다 만 막대기로 끄집어내고선 그 까맣게 탄 두툼한 껍질을 젖히면..
와....!!! 그 향기하며.. 그 뽀송거리는 전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맛이다.

중국의 어느 남방민족 요리집으로 초대받아 가서 애피타이저라고 나온 전갈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곤충 튀김, 서울의 어느 룸 사롱에서 고급 안주라고 나온 메뚜기 튀김,
어느 나라에 가던지, 스테이크를 오더 할때면 매번 같이 시키던 구운 감자..
그런데.. 어릴적 춥고 배고팠던 당시 먹었던 그 때 그맛을 도저히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거다.. ㅎ

초등학교 4학년 말 서울로 전학을 와서는 죽~ 서울생활을 했지만
그 전엔 초등학교만 세곳을 다니며 부친과 전방 생활을 했었는데
어머니과 간호 장교들을 제외하면 온통 남자들이었고 동생 역시 남자였던지라
남성 위주의 공동체.. 특히 군이라는 특수목적집단에서 난 유년 및 소년시절을 보낸 게 된다.




2차 대전 때의 분대전투의 실상을 너무나 리얼하게 그린 1960년대 인기 전쟁 드라마.. 전투..

어렸을적 거의 한주도 빼지 않고 흑백 TV로 시청하곤 했는데..
당시 거의 찾기 힘들었던.. 그래픽으로 처리된 총검과 시그널 음악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부친은 간혹 시간이 되실때 같이 시청하시곤 했는데,
전투의 실상에 대해 배울게 많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


내가 다들 아저씨라 불렀던 그 군인들이 난 참 좋았다.
신체 건강하고 항상 민첩하게 움직이며 절도가 있었던 그 '군인' 이라는 존재감이
내 속 깊이 자리잡게 되는데,  그건 사실 부친을 가까이서 대하며 느끼는 절대적 존경심,
절대적 포스.. 뭐 그런 거였던 것 같다.

부친은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하는 초기까지도
위인전에 나오는 어느 위인들 보다 내게 절대적인 정신적, 신체적 그리고 지식적 지주셨다.

월남전에 한국의 정규군이 파병되기전 야전병원인 비둘기 부대의 경비 소대장으로 파월되셔서
한국군 사상 베트콩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끄셨고 몇주간 외신들과 인터뷰를 즐기시기도 했다.

미국의 포트 베닝스에서 실시되는 전세계에서 가장 힘들고 혹독하다는 레인져 특수전 훈련까지
이수하시고 한국의 공수부대와 유격훈련의 인프라를 닦으신 전형적인 무골의 군인 이셨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에서 특수부대 출신 말론 브란도가 이수했다고 열거되는 바로 그 훈련이다.

난 부친 보다 잘하는 것이 대학 시절 전공한 물리나 수학을 제외하곤 하나도 없었다.

아버진 나보다 모든 게 뛰어나셨는데.. 지금도 그러시다.
수십년 전부터 싱글 핸디인 골프를 비롯해, 스피드 스케이트, 수영, 사냥, 천렵, 수상스키, 스키...
장군이 되셔서까지 수송기나 치누크헬기에서 혹은 작은 UH-1H 헬기 문 앞에 걸터 앉으시고는
낙하산을 메고 점프를 하시곤 했다. 난 간혹 부친의 그런 실제 훈련 모습을 가까이에서 뵙곤 했는데,
내가 괜히 흥분해서 힘이 솟아오르곤 했다.

난 낙하산은 아예 매보지고 못했고, 골프 싱글은 아직도 요원하다.
수영, 스키, 스케이트, 사격.. 모든 걸 부친께 배웠었다.

.....

난 군인이 되었어야 한다.
.. 젠장.. 그런데 난 나이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그런 날 발견한 거다.



A Tribute to "Combat"





토론토에 타운이 형성되고 여왕을 주축으로 나라를 세우려는 영국군과 왕당파 커내디언 민병대들은
온타리오 호수를 통해 상륙하려는 미국의 양키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도시 방위를 위한
요새를 건설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둘러본 요크 요새 (Fort York)이다. 

우리나라의 대대급 규모가 운용될 수 있는 규모의 요새였는데 1800년 초,
즉 200여년 전에 축조된 것이다.
1812년 과 1813년 미육군과 해군 연합군이 요크 요새를 침공했는데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던
영국군은 대패하며 요새를 버리고 퇴각한다. 이때 화약고에 폭발 장치를 해놓아 수백여명의
양키 군대를 살상 시키게 된다.
이후 양키군들은 부근 요크 지역을 약탈하며 파괴와 방화를 일삼았는데,
1814년 재조직된 캐나다 유격대에 의해 격퇴되고 영국군과 캐나다 군은
오늘의 모습으로 요새를 재정비한다.



어쨓거나.. 통상적인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곳 요새에서 내 눈에 띄는 곳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이곳 요새를 지휘했던 한 장교의 방이었다.. 



부친 생각이 많이 났다..
꽤나 멋지게.. 마치 전쟁과 평화에서나 나옴직한
귀족 출신 장교의 프라이드가 잔뜩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군인의 주변은 단촐하기 이를 때 없다.
침대와 간단한 세면 시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제복을 놓아 둘 옷장이 전부다.
그리고 특이한 것이 있다면, 무자게 정갈하다는 거다.

지휘관들은 부관이나 당번들이 있어 항상 정리 정돈이 확실 하게 유지되지만
워낙 초급 장교때 부터 생활 습관이기 때문에.. 장교들의 주변은 항상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이 나 바로 전장터로 나가면 돌아올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부친의 직책이 바뀔때 마다 주로 전방 주변이었던 관사를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그저 모두가 간단한 구조였다. 장식품이라야 진급때마다 선물을 받으시던 지휘봉 등이 고작이었다.

북한과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었던 시절에는 뻑하면 비상이 걸렸다.
방학때나 주말에 내려가곤 하던 부친의 관사에서 잠을 자다보면, 이런 저런 소리가 들리고
부친은 벌써 군복으로 갈아 입으신 뒤, 권총을 차시면서..
.. 아빠 다녀올테니, 니들은 더 자라.. 하시곤 했다.
비상이 걸려 이른 새벽에 부대로 혹은 野地로 나가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럴때 부친의 뒷모습은 항상 당당하셨다. 언제나..  





품위, 절제, 희생, 건전함.. 조국.. 남성적 삶..
단도직입적임.. 결코 굴하지 않는다.. 항상 차려있는..

이러한 단어들은 언제나 날 뜨겁게 했었다.
닳고 닳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그래도 날 뜨겁게 한다.

'조국' 이란 말은 참 오래도 잊고 있었는데..
남의 나라 조국이 애처럽다 보니 다시 떠올랐었다.
니카라구아의 엘리트 젊은이들 10여명을 데리고 프로젝트를 하면서
'너희들은 니들 조국에 도데체 뭐니??' 라는 식의 훈시를 허구 헌날 하다보니
다시금 날 뜨겁게 만드는 단어가 되었었다..

어쨓거나 저런 과격한 단어들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내가
모나지 않고 두루 두루 잘 지내야 되는 큰 조직 생활을 잘 했을 리 없다.

부친을 닮아 그런지 난 불같은 성격을 지녔다.
아니다 싶으면.. 끝까지 아니었고..
명분이 없는 일은 손대기가 정말 싫었으나
스스로에 대한 명분이 서는 일은 지칠줄 모르고 했다.

직원들이나 고객들 앞에서 강의를 하거나 프리젠테이션을 할때
난 내가 마치 무슨 선동가 처럼 큰 제스처와 목소리로 강의를 해대는 날 발견하곤 했다.
사람들의 숫자가 많을 수록 좋았고.. 내가 말하는 내용에 압도 당하는 audience 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마치.. 나를 따르라! .. 라고 앞에서 소리 치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어쨓거나, 난 조직 생활을 한 참 하고 나서야
내가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군인 체질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아무것도 돌이킬수 없는 불혹의 나이에 불혹은 커녕,

야.. 이거 참 재미없게 살았네.. 살아보니 이길이 아니었네..

... 맙소사..


dignity.. abstinence.. sacrifice.. soundness..
fatherland.. manhood..
straightforward..
.. never compromising..
.. always on..

those words which made me really really hot in blood..



I should have become a soldier..
a lonely solider.. responsible for the lives of his men
fighting against enemy to survive
for his community, for the mountrains and rivers to protect,
and for ideology to pursue if there is any..

However though..
I had only a chance of getting 6 months of military training
to become an entry-level officer in the army.
And as soon as I got the badges of insignia
on my shoulders to become a platoon leader,
I got discharged from the obligatory military service
since I passed the national exam substituting
3 years of service to only 6 months..
The opportunity was given only to the qualified students
of having master degree or higher.

At least I enjoyed much of the programs for the military training
which allowed me lot closer to the wild nature of human being
as a man.. only with his own flesh and discretion..
of course with the minimum set of weapons for survival.

Now I am just on my reflection of those tough unforgettable days as a man..

Over the night walking for 100km of distance
with all the heavy military gears on the back..
Roadside walking for returning to barrack in the midnight
watching movie-scene sort of shadows of my colleagues
walking in a long row under the headlights of 2 and half ton trucks..


Trajectory of red-orange color of the bullets in the night with M-60 machine gun..
with good feeling of recoiling for automatic fire..


Military orienteering under the full moon light..

picking up couple of apples from the trees in the local orchard..

what a fresh taste..
...
and incessant feeling of hunger..
and chilly, chilly and chilly.. everyday in the fall & winter..
I actually like the weird feelings that I had not been accustomed to.. by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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